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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마가복음 10:46-52)

by 장목사pastor 2023. 7. 18.

초대교회사에 황금의 입이란 별명을 가진 요한 크리소스톰이란 유명한 교부이자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아, 네가 정녕 나를 버리려느냐? 나도 너를 버리노라.”라는 설교와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타락한 것이 오히려 기회이다. 성도에게는 세상과 다른 삶의 목표가 있음을 보여줄 기회이기 때문이다.”라는 설교로 유명합니다.

크리소스톰은 말년에 로마의 시이저는 주님이 아니고, 예수님만이 주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체포되어 로마의 아르카디우스 황제에게 처형당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을 체포한 황제는 그에게 내릴 형벌을 고민하다가 너를 로마에서 추방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자 크리소스톰은 폐하, 폐하께서 저를 저의 집에서 추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가 제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화가 난 황제는 너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자 크리소스톰은 저의 보화는 하늘에 있습니다. 아무도 그곳을 뚫고 도적질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나는 너를 감옥에 집어넣어 너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접촉을 일체 금지시키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크리소스톰은 저에게는 결코 저를 떠나시지도 않고 버리시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신 한 친구가 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분노한 황제는 너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자 크리소스톰은 저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있으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크리소스톰은 407914, 유배지로 끄려가는 중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신을 해하는 자들을 용서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속박과 투옥,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상관없이 정말로 자유로운 신앙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속에서 자신의 신체 구조와 환경은 절망 가운데 살았지만,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신앙인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다름 아닌 소경 거지 바디매오입니다.

이 시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1. 여리고의 소경 거지인 이중고를 가진 바디매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 46절에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라는 말로 본문은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대부분 사역은 갈릴리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이루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야 하고, 성경대로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아 십자가 형벌을 당하는 순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걸음은 먼저 요단강을 건너 동쪽 베뢰아 지방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요단을 건너 서편 유대 땅으로 오시는 걸음입니다. 본문에 여리고는 요단강 동편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예수님 당시 여리고는 헤롯왕이 지은 자신의 겨울궁전이 있는 곳입니다. 이 여리고에는 종려나무가 많아 종려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비옥한 오아시스였습니다. 또한 정치, 경제적으로도 중요하여 당시 팔레스틴 지역 내에서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였습니다.

지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여리고를 지나시는 중입니다. 이때는 유월절 축제일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수많은 순례행렬들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의 길가에 앉아서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한 자는 바로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였습니다. 그는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지고,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가난하고 비참한 인생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가난만큼 인생의 비참과 서러움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난보다 더 슬픈 것은 소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님, 오늘 우리 중에는 문자적인 소경과 거지가 되어, 이중고로 괴로움을 겪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최소한 두벌 옷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영적으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며, 슬픔과 상처로 인해 괴로워하는 잃어버린 양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자기를 돌아 볼 때에 어떤 환경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육체적으로는 밝은 시력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부유하다 하더라도, 영적으로는 바디매오보다 더 가난한 소경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중에 바디매오와 같이 이중으로 절망에 처한 분이 있습니까?

이중으로 죄를 지은 분이 있습니까?

이중으로 낙심에 처한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본문을 자세히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서의 저자 마가는 이 사건을 통하여 이중으로 고통을 당하는 병자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중으로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이중으로 고통을 당하는 병자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소원합니다.

 

2. 바디매오의 소리치는 믿음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의 앞 뒤 문맥을 보면, 앞 단락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듣고서도 제자들은 영적무지와 세속적 야심으로 자리다툼에 연연해있습니다(10:35). 그리고 다음 문장에는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온갖 궤계를 동원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형태가 집중적으로 등장합니다(11:18).

반면에 바디매오는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는 영광도, 메시야적 권능을 직접 보는 축복도 없었습니다. 또 유대지도자들처럼 율법적 지식에 해박한 것도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는 놀라운 영적 안목을 가졌습니다. 바로 바디매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47절에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들음에서 왔습니다. 그는 볼 수는 없었으나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믿음이란, 보는 것으로 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편으로 보려고 힘을 씁니다. 어떤 이들은 신비적인 문자나 상징들을 이곳저곳에 달아 놓습니다. 그리고 이같은 것들이 은혜를 가져다주는 요소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믿음은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바디매오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으나 메시야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었고,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의 불행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기적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 소리는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셨다는 사실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사람의 믿음은 예수님의 소식을 들음에서 나왔습니다. 이러한 믿음이야 말로 최상의 신앙입니다.

성도님, 우리가 볼 수 없어도 들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만질 수 없어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여리고의 길가에서 많은 무리들의 발자국소리와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디매오는 놀라서 누구의 행렬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자 사자처럼 달려들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오는 최상의 믿음을 가지시길 소원합니다.

또 그 믿음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47절에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바디매오가 소리친 내용은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메시야적 칭호입니다.

예레미야 235-6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라고 했는데, 이는 메시야 시대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디매오의 부르짖음 속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신 메시야란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성도님, 우리는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부르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 그가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오셨고, 무엇을 행하셨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본성과 능력과 약속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이름 예수님 앞에 소리칠 것입니다. 그 앞에 엎드려 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잃어버린 양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한 삶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10:10).

당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가문과 스승을 내세우면서 자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 절에 나오는 바디매오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약속, 언약에 의지하여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 곧 언약에 의지하는 믿음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많은 궁핍가운데서 부르짖는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47-48절에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고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금 자기 앞을 지나고 있다는 말을 바디매오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얼마나 간절히, 얼마나 큰 소리로 부르짖었던지 사람들이 그를 막아서면서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이 기회를,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의 사이를 여지없이 차단시켜버렸습니다.

본문의 문장은 미완료형입니다. 즉 바디매오는 계속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치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꾸짖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런 모습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입니다. 많은 궁핍 속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입니다. 계속되는 그의 외침은 바디매오의 믿음이 얼마나 간절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기까지, 진정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궁핍함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는 부요하다. 나는 굶주리지 않는다. 나는 헐벗지 않는다하는 사람은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여러분의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하다면, 오늘 여러분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3. 바디매오의 전인을 치료하는 말씀입니다.

본문 49-50절에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라고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부르는 소리에 겉옷을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이 사건을 기록한 마가는 바디매오의 기쁨과 벅찬 감격을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부족한 노숙자입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에게 외투는 자신의 모든 재산입니다. 사실 밤과 낮의 기온차가 큰 팔레스틴에서 외투는 낮에는 의복으로 밤에는 침구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거지 소경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겉옷은 소중한 재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디매오는 외투를 벗어 던졌습니다. 이유는 그가 메시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성도님, 바디매오가 겉옷을 벗어던지듯이 예수님을 믿기로 부름 받은 사람은 자신의 겉옷, 즉 모든 위선, 거짓, 자랑, 겉치레 등을 내어 버리고 땅을 박차고 예수님에게로 달려가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자기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 최후의 기회를 놓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예수께로 왔습니다.

그리고 본문 51절에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간절한 소원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디매오의 원하는 바를 물으십니다. 이는 두 사람 간에 인격적인 교제가 시작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 즉 볼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 그의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나의 영의 눈은 보고 있는데, 육의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선생님 육의 눈도 보기를 원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메시야적 권위로 단호하게 바디매오의 치유를 선언하셨습니다. 본문 5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바디매오는 눈을 뜨고 사물을 똑똑히 바라보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육체의 질병만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병든 영혼이 치료받았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인생관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는 구원받은 감격과 그 은혜를 잊지 못하여, 예수님의 뒤를 좇아가며, 영광의 찬송을 불렀습니다(18:43).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는 소리쳐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한 여리고의 소경 거지 바디매오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최상의 믿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 믿음,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믿음,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궁핍한 자를 향한 말씀입니다.

마침내 영과 육, 전인을 치료해 주신 주님의 선언이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자신은 이중의 절망과 고통에 있음을 고백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향하여 소리치는 갈급한 사람, 궁핍하다 하는 사람, 간절한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주님의 치료는 인생의 치료와 달라서 언제나 부분이 아니라, 전인을 치료해 주십니다.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은 복음에는 회개와 믿음 외에는 아무것도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예수 믿음이 있는 한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에서 장차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은 유한에서 영원입니다. 절망에서 소망입니다. 진노에서 사죄와 용서입니다. 영벌에서 영생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걸음을 머물게 하고, 그분의 긍휼을 입기를 축원합니다.

영적인 소경에서 믿음의 눈을 뜨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불안과 공포에서 평안의 축복이 더해지기를 축원합니다.

영육의 가난에서 부요의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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