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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누가복음 18장 15~17절)_어린이주일

by 장목사pastor 2021. 4. 29.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늙고 병들었을 때, 제자들로부터 한 가지 부탁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메시지를 하나만 들려주십시오!” 소크라테스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말했습니다. “아테네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시민들을 향해 간절히 외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네!” 제자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 말이 무엇입니까?” 소크라테스가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여,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충실하지 말라! 그것을 물려받을 아이들에게 좀 더 많은 사랑과 정성을 쏟아라! 이것이 내 일생을 통해 얻은 가장 귀한 교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미래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하며, 오늘을 참고, 연구하고, 수고하고, 일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진정한 미래는 아이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사실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깨우쳐 주고 싶은 마지막 바램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어떤 부모들이 팔레스틴의 어두운 현실 속에서 더 나은 삶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지혜로운 부모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이 일로 인하여 벌어진 사건입니다.

  주일 이 아침에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받고자 합니다.

 

1.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온 부모가 있습니다.

  본문 15절에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라고 하였습니다.

  때는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마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 베뢰아 쯤으로 생각됩니다(막10:1). 이미 예수님께서는 온 이스라엘과 인근 이방인들에게까지 화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은혜로운 복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삶의 문제로 고통당하는 사람들, 온갖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주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부모들은 집과 거리에서 놀고 있는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저들은 아이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받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부모가 임종을 앞에 두면, 자식들을 향하여 그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노아가 세 아들들에게,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이삭이 야곱과 에서에게, 야곱이 열두 아들들에게 한 유언기도가 그 축복의 기원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는 첫 생일을 맞는 아이들을 유명한 랍비에게 데리고 가서 축복을 받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팔레스틴에서 메시야로 소문난 예수님께 자신의 아이들을 데려오는 것은 어쩌면 부모로서 당연한 바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예수님의 축복을 받게 하려는 부모들은 이미 예수님의 축복을 경험하였고, 예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자기뿐 아니라, 자신들의 아이들도 예수님께 데리고 가고 싶었던 영의 이끌림을 받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자기 아이들에게도 알게 하고, 만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의 인격에 예수님의 형상을 그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참으로 아름답고 지혜로운 부모들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부다에게 자기 아이를 데리고 갔다면, 그 아이들은 허무주의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만약에 공자에게 데리고 갔다면, 아이들은 중용(中庸)과 윤리운동을 하는 길로 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만약 마호멧에게 데리고 갔다면, 아이들은 알라의 종이 되어 전사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만약에 점쟁이나 어떤 철학관에 데리고 갔다면, 아이들은 운명론자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지혜로운 부모들이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들은 참으로 옳은 부모요, 생명의 인도자였습니다. 이유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에게 자기 아이를 데리고 갔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 된 부모의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오늘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은 어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른들만 교회가 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바로 왕 앞에서 남자와 여자 뿐 아니라, 어린아이도 가고, 양과 소떼를 몰고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했습니다(출10:9).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아니 자식을 다 세상에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희망을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신앙의 부모 된 자들은 마땅히 어린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나와서 유아세례를 받게 하고 믿음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유치부와 초등부와 중고등부를 통해 하나님을, 교회의 규칙, 예배드리는 법, 찬송부르는 법, 헌금하는 법, 기도하는 법, 성경을 가르쳐 아이들의 미래를 희망적이게 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 부모라면 반드시 그 자녀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그 부모뿐만 아니라, 그 아이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주님에게로 데려오는 지혜로운 부모가 되시길 소원합니다.

 

2. 제자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5절에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오는 부모들을 제자들이 꾸짖었다고 합니다.

  여기 ‘꾸짖다’는 헬라어 ‘에피티마오’(επιτιμαω)라는 말은 “비난하다”, “책망하다”, “훈계하다”, “따지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비난하고, 책망하고, 훈계하고, 따졌을까요?

  첫째 이유는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중입니다. 심각한 각오로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면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바리새인들을 당황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이들이 끼어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붙들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에게 복을 비는 일보다, 하셔야 할 더 크고, 더 중요한 일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은 주님의 교훈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기적도 필요치가 아니했습니다. 또 아이들에게 복을 빌어준다고 당장 눈앞에 확실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들의 변화는 이삼십 년 뒤에나 나타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에 관한한 전부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미래보다 지금이 더 급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본문을 병행해서 기록하는 마가복음 10장 14절에는 “분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영접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강력한 의지표현입니다.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아이들의 마음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이들을 가르쳐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칠 때에 보면, 서로 장난질이나 하고, 돌아다니고 가르치는 내용을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질문을 해보십시오. 줄줄 대답합니다. 장난치면서도 들을 것은 다 듣습니다. 반면에 어른들은 고개도 끄덕이고 간혹 “아멘”을 외치며 모두 이해하는 것처럼 듣습니다. 그러나 막상 물어보면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후순위다고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제자들의 편견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천국은 아이들의 것입니다. 천국은 바로 순박한 아이들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째 이유는 아이들의 영적인 궁핍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어떤 어머니가 군중 틈에 끼여서 “내 아들이 귀신이 들려서 심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제자들은 그 어머니를 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내 아이가 중한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뼈와 가죽만 남아 있습니다. 나로 하여금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예수님이 안수케 하도록 도와 달라”고 했다면, 제자들은 그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면서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만져주심을 바라고, 아이들을 데려오자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이유는 제자들은 아이들의 영적인 궁핍에 대해 몰랐기 때문입니다.

  성도님, 여러분의 아이가 어릴지라도 그들의 마음속에 죄악의 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 돌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 아이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아직 행동으로 옮겨지지 아니한 악한 성향이 있고, 그것이 잠재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정복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자연적인 출생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주어진다는 내용이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이들이 죄 가운데서 태어난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믿음의 훈련이 필요하고, 복음을 듣는 것이 필요하고, 예수님의 만져주심과 축복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아이들의 죄성과 영적인 궁핍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똑같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축복을 받아야하는 이유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축복하셨습니다.

  본문 15절을 다시 보면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만져 줌”이란 헬라어 “하프테타이”('απτηται)는 구체적으로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온 목적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축복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내 아들과 딸이 주님의 축복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부모들이 자기에게 데리고 온 아이들에 대해서 결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셨습니다. ①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6절). ② 어린아이들을 예수의 품에 안았습니다(막10:16). ③ 저희 위에 손을 얹고 안수하여 주었습니다(막10:16, 마19:15). ④ 저들은 하나님 나라의 표본(겸손, 섬김)이라고 하였습니다(17절, 막19:14).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로 데려온 아이들을 불러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했습니다.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은 자신들이 상상하던 그 이상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결과 임마누엘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요게벳은 아들 모세를 하나님의 언약의 세계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결과 모세는 자라 출애굽운동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한나는 어두운 시대에 사무엘을 성전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 결과 사무엘은 성장하여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와 왕정시대를 잇는 가교역할을 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자신들의 기대하는 이상으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아들을 죽음의 자리에서 살려냄을 받아 데리고 갔습니다(막9:17, 21, 25-27). 왕의 신하는 병든 자기 아들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열병에 걸려 죽게 된 아들을 다시 살리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요4:49-54).

  이처럼 자기 아이를 예수께 데리고 간 부모는 언제나 좋은 결과를 보게 됩니다. 큰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건강한 아들, 새 아들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오기만 하면, 나머지는 주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의 품에 안기고, 예수님의 어루만짐을 받고, 예수님의 안수기도를 받은 그 아이들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상상해 보십시오. 아이들이 성장하고 난 후에, 이날의 기억을 저들의 평생을 지배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들이 살아 우리 곁에 있다면, 모두가 그의 이야기를 들으러 모여들 것입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성령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살아서, 우리 곁에서 더 확실하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우리가 받은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요 상급입니다.

  저들에게는 엄청난 가능성의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의 영혼을 위해서, 장래를 위해서, 소망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야 합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손뼉 치며 노래 부르고, 함께 헌금하고, 함께 춤추고, 함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튼튼한 인생의 기초 작업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모든 부모들은 어린아이에게 예수님의 축복을 받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고, 지혜의 근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배우고, 영원한 구원의 복음을 받는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하여 아이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어린이는 부모의 것도 아니요 하나님께로부터 위임 받은 선물이므로 범사에 본이 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 위탁 받은 어린이의 훌륭한 성장을 위해 좋은 교회를 만들기에 앞장서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아이들을 위한 길이고, 교회의 현대적 사명 중의 하나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독일의 한 나이 많은 교장 선생님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교장 선생님은 아침마다 교실에 들어가서는 언제나 모자를 벗고 예의를 갖추어 학생들에게 절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이 대답하기를 “소년들 중에 장차 어떤 사람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말은 옳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년들 중에 하나가 유명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였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고,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축복의 받게 하는 은혜가 모든 부모님들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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