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요한일서 새벽설교(요한일서 2장 12~17절)

by 장목사pastor 2021. 4. 22.

  앞 단락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계명을 지킬 것을 권면을 하면서 계명의 핵심인 형제 사랑을 실천할 것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본문은 이어서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위해 세상에 대한 사랑, 즉 세상과의 교제를 경계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2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여기 자녀들아는 수신자인 성도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아, 테크니아 라는 단어는 요한일서 외에는 요한복음 1322절 단 한 곳에서만 나타납니다. 거기서는 작은 자들아, 소자들아 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요한일서에는 이 단어가 7번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마치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대하듯 성도를 향한 애정어린 호칭으로 사용되어졌습니다.

  연로한 사도요한이 영적 아버지로서 성도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그처럼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너희는 너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존재다 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 구원받은 성도답게 살 것을 강조하여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여기 아비들아, 청년들아이렇게 부르고 있지만 그 대상은 이 요한일서 서신을 받는 성도들 전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지 이 아비들아 라는 이 호칭은 교회안에서 나이가 많거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아비들, 교회의 지도자들은 지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지혜가 바로 태초부터 계신이, 즉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충만하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청년들아 라는 이 호칭은 상대적으로 젊은 이들을 뜻하기도 하지만 믿음이 견고하여 말씀을 붙들고 악한 자들의 핍박을 견딜 뿐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을 물리친 성도들을 격려하는 의미가 있다고 볼수가 있습니다.

  14절은 12,13절을 반복하여 강조한 것입니다. 14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2, 13절에서 말씀한 것을 조금 다른 표현으로 14절에서 반복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15절에서 17절은 사도요한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위해서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성경에서는 세상을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는 중립적인 개념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지칭할 경우입니다. 또 하나는 부정적인 개념으로 아담의 범죄 이후에 타락하여 마귀의 지배를 받는 이 세상을 지칭할 때, 세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여졌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육적인 것이나 썩어져 없어질 것들을 의미합니다.

  성도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이것들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마음에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인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있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점점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계시키는 말씀입니다.

  16절은 15절에서 말한 성도들이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사도요한은 세상의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합니다. 육신의 정욕은 여기 육신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육신이 아니라 영과 대립되는 죄의 기관으로서의 육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육신의 정욕도 생리적인 욕구가 아니라 죄성을 쫓아 일으키는 모든 욕망을 의미합니다.

  안목의 정욕, 이것은 육신의 정욕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보는 것에서 비롯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볼 때, 욕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도 선악과 하나님께서 금하신 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볼때에 먹고 싶다는 욕망이 따라 일어났기 때문 아닙니까? 그래서 이 안목의 정욕을 우리들이 제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생의 자랑은 썩어질 육신의 삶의 무엇을 자랑하거나 과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 특별히 자랑이라는 말, 헬라 단어, 알라조네이야 라는 이 단어가 아주 독특한 말입니다. 그래서 이 본절과 야고보서 416절에만 나타나는 단어인데,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헛되고 허무맹랑한 과장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랑하는 모든 것들에 속성이 그러하다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고 정말 영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헛되고 아무것도 아니기에 이것을 가지고 만족하면서 자랑하고 과시하는 것은 그것은 허망한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7절이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지나간다는 것은 없어진다, 사라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없어질 것, 사라지고 말 것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리석고 허무한 일이 없이 않겠습니까? 그러나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말은 지나가되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직역을 한다면 온 세대까지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것들은 이 세대로써 끝이 나지만 하나님의 뜻과 그 뜻을 따르는 자는 오는 세대까지 영원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다시 한번 확인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것들이 다 필요없고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느정도 필요하기 때문에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같은 차원에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자세를 가진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듯이 성도는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만큼 하나님과는 멀어지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불가능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이런 속성, 특성을 바로 알고 늘 의식하면 우리는 세상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지나가버리고 없어져버리는 세상의 허무성을 우리가 늘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고백하지만 정말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너무 집착하고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것들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라면 그것은 다 지나가고 사라지고 없어집니다. 영원한 것,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