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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새벽설교(요한일서 4장 13절~21절)

by 장목사pastor 2021.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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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죄인인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삼으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이기 떄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함을 가르친 앞단락에 이어서 본문은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만이 마지막 심판날에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에 결론적으로 사랑을 실천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13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이 13절은 그 내용이 324절과 거의 같습니다. 324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여기 그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임을 전절인 23절이 보여줍니다. 23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또 이 계명을 지키도록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14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은 910절의 내용을 말합니다. 또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 아들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사도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14절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한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15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값없이 주시는 그 은혜를 받아들이면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여기 하나님의 아들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시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폈지만 423절에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이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온전히 시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신비로운 연합과 교제가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6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2절과 함께 사랑이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를 이루는 요소임을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12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2절은 성도의 사랑을 가리키고 오늘 본문의 16절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할 때,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는 진정한 연합과 교제의 축복을 누리게 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17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 17절의 의미는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해지면 그 결과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사 보내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을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면 사랑을 온전히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범죄한 사람은 심판날에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없지만 이 계명을 순종하여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심판날에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주를 닮아 그런 사랑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여기 두려움 포브스라는 단어는 노예가 상전을 무서워할 때 가지는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사랑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움, 무관심, 이기적인 행위, 이런 죄를 범할 때에는 심판의 날에 우리의 주인되시는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때에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인이 명하신 것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여서 사랑을 온전히 이룬 사람은 이런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19절은 다시 한 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동인을 이야기 합니다. 9절에서 11절의 내용을 요약 반복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형제를 사랑한다는 이 결론이 연역법적 추론이라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결론은 귀납법적 추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연역과 귀납적 추론을 병행하여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라는 양면을 설명함으로 어느 한쪽에 대한 사랑의 결여는 결국 그 반대쪽에대한 사랑의 결여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차원의 존재 즉,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보다도 차원이 다른 존재 곧 하나님을 결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논리는 기본적이면서도 단순 명료합니다.

  21절은 사도요한의 결론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입니다. 때문에 우리 인간이 사랑하거나 하지 않거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반드시 지켜야 될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2237절에서 4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계명의 핵심 명령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처럼 중요한 계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사랑의 실천을 가능하면 좋은 일 정도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그것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비해 너무나 얄팍하고 이기적인 우리 자신의 사랑의 수준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더더욱 우리의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 여부는 예수님의 마태복음 25장 양과 염소의 비유가 보여주는 것처럼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면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점검하면서 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을 다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감격한 사람답게 형제들을 이웃들을 사랑하는 실천적인 삶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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