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환난 중의 성도(하박국 3:1-19)

by 장목사pastor 2023. 7. 19.

미국 서부개척 당시 캘리포니아 주의 거부였던 릴랜드 스탠퍼드’(Leland Stanford, 1824-1893)라는 사람에게 15살이 된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스탠퍼드 부부는 아들의 성장을 보면서 언제나 흐뭇한 마음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스탠퍼드는 사업의 성공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상당한 재력가가 되었고, 아들에게까지 자신의 부를 물려주려고 부단히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 식구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여행지에서 아들이 장티푸스로 앓다가 죽고만 것입니다. 스탠퍼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며칠을 뜬눈으로 보냈습니다.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어떻게 자기 아들의 생명을 건질 수 없었을까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자식을 잃고 보니 그 많던 재산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탠퍼드는 절망에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하나뿐인 자식을 잃었지만 캘리포니아의 모든 청년들을 자기 아들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투자하여 대학을 세우게 되었는데, 이 대학이 바로 명문 스탠포드 대학입니다. 스탠퍼드는 아들을 잃은 절망 속에서 새로운 삶의 방향과 목적을 찾은 것입니다.

그는 믿음의 선배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환난 중의 성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받기 원합니다.

 

1. 유다의 시대적 상황

본서는 유다의 여호야김 왕(BC. 609-598) 시대에 예언활동을 했던 하박국 선지자의 삶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당시 유다 사회는 극도로 부패하였고, 여호야김 왕은 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유다는 앗수르를 멸망시킨 신흥제국 바벨론에 의해서 파멸의 길로 들어서는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졌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막강한 앗수르를 멸망시킨 신흥제국 바벨론은, 자신의 영토를 점점 확장하여 인류 구원의 등불인 유다마저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순결하지도, 정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신앙인의 모습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힘과 부를 의지하고, 불법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죄성에 따라 이방의 풍속을 쫒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당시의 사회는 의인(경건한 사람)이 악인(불경건한 사람)에 의해 압제를 당하였습니다. 의인이 악인에 의해 조롱과 속임과 괴롭힘을 당하였습니다. 사회는 공의가 서지 못하였습니다. 불의와 불법과 무법이 만연하고, 악인들이 의인을 에워싸는 형국이었습니다(1:2-4).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자기 민족을 시작케 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이방나라, 세속국가를 의지하였습니다. 유다는 당시 근동지역의 국제정세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쇠퇴해 가는 애굽을 동경하고, 애굽과 동맹하고, 애굽의 도움과 약속을 의지하였습니다. 이렇게 유다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는 역사의 격동기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불신앙의 백성, 의인을 괴롭히는 사회, 이방나라를 의지하는 조국 유다에서 하나님께 항의의 기도를 연속적으로 합니다.

그 첫째가 공의의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경건한 사람을 억압하는 유다를 징계하지 않으시는지에 대한 것입니다(1:3). 이때 하나님은 선지자 하박국에게 대답하십니다. 때가되면, 유다 백성들의 죄악을 징치하기 위하여 갈대아 사람, 바벨론을 일으키겠다고 하십니다(1:6).

이러한 하나님의 응답은 선지자 하박국으로 하여금 두 번째 항변을 토로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하필이면 왜 유다보다 더 악하고, 더 잔인하고, 더 강포하고, 자기 힘을 신으로 삼는 바벨론을 들어서 선민 유다를 징치하십니까? 라는 기도입이다((1:13).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바벨론은 징계의 도구가 될 뿐, 그들 역시 자신들의 죄악으로 멸망을 당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의인은 자기 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인은 환란 중에 결코 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이 위대한 이신득의의 복음을, 하박국 선지자에게 큰 판에 기록하여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만백성 앞에 공개하라(2:2)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 계획은 하박국 선지자로 하여금, 창자가 흔들리고, 그의 입술은 심한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말았습니다. 즉 다가오는 조국 유다의 환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박국 선지자의 뼈는 썩는 듯한 진통을 겪었습니다. 그의 몸은 두려워 떨었습니다(3:16).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 어쩔 수 없는 고난의 사건 앞에 하박국 선지자는 어떻게 했을까요?

하박국 선지자의 삶의 자세는 오늘의 성도들에게 삶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2.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2절에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장차 유다 땅에 하나님이 행하실 역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즉 바벨론에 의한 범죄한 유다의 징계 소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징계의 도구인 바벨론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 소식도 들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 앞에 하박국은 놀랐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멀찍이 계시는 것만 같았던 하나님, 현실세계에 침묵하시는 것만 같았던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에 개입하셔서 범죄 한 유다를 징계하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민을 유린하고, 잔해하고 교만한 강대한 나라 바벨론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답변에, 선지자는 놀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하박국의 기도는 수년 내에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즉 필연적으로 있어야할 범죄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라면, 그 징계가 빨리(수일 내에) 지나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진리가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바벨론에 의해 유다 백성들이 징계를 당할 때에 부디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잔인하고 사나운 칼날과 압제 가운데 떨어질 때, 결코 멸망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구원의 은총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본문에 하박국 선지자는 해산의 진통을 통하여 아이가 출산하듯이, 하나님의 조심스런 보살핌, 긍휼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는 유다의 새로운 탄생, 새로운 생명, 새로운 부흥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소원하였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민만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부르짖음이요, 간구였습니다(32:10-12, 77:9).

성도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비록 역경과 환란을 통하여 주님의 뜻이 진노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성도는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패배자가 되지 않고, 승리자가 되기를 위해 주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절망 중에라도 희망을 구해야 합니다. 어두움 중에도 밝은 미래를 바라보고, 주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와 같은 시대, 같은 상황아래 살고 있지는 아니합니다. 그러나 비록 시대가 다르고 그 삶의 양태는 다르다 할지라도 인생은 여전히 환란과 고통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중에 자신의 연약과 실수로 어려움을 만난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수많은 사람 중에 자기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삶을 포기한다거나, 더욱 불신앙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하나님과 더 멀어져 버리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하박국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아무리 어려운 현실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뜻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신속이 지나가고,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설교 서두의 스탠퍼드가()의 이야기처럼, 나와 가족과 회사가 주님의 영광의 도구가 되기를 바라야 합니다. 순경의 때만이 아니라, 역경의 때에도 주님의 뜻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주는 분명한 진리는 범죄 한 유다에게 아무리 잔인한 바벨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멸망의 도구가 아니라 징계의 도구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는 아무리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멸망의 도구가 아니라 징계의 도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하박국과 같이, 하나님이 역사 앞에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가득차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과 가정에 그리고 넓게는 이 사회에 임한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면 그것이 빨리 끝이 나고, 하나님이 새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하시고, 나의 직장과 사업장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마침내 선교의 도구로서 쓰임받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가져야할 자세입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길 소원합니다.

 

3. 구원의 하나님으로 즐거워해야 합니다.

본문 317-18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주님의 뜻이 나타날 때까지, 고통과 궁핍이 따른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기뻐할 것을 다짐합니다. 비록 바벨론의 침략과 환란으로 인하여 땅에 먹을 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 주실 미래를 바라보고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히브리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 믿음의 길을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외로운 나그네 인생길을 가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순종했고, 시험을 당할 때에도 평안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지에 끌려와 미움을 당하고, 정적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어 죽음의 굴인 사자굴 속에 던져짐을 당해서도, 임마누엘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그 마음속에 평안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전도하다가 누명을 쓰고, 매를 맞고 빌립보의 감옥에 갇혔으나, 복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으로 인해 하나님께 찬송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기쁨의 메시지를 수많은 성도들에게 전하였던 것입니다.

성도님, 평안이라는 것은 세상의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에게만 주시는 하늘의 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믿는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환란의 터널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하여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언약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다가올 이스라엘의 참된 구원을 바라보면서 즐거움과 평안을 누렸던 것입니다(3:3-15).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살펴보면, 평안과 감사를 잃어버린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삶을 보면 고난의 때는 고사하고, 과학과 기계문명의 발달로 물질이 풍부해지고 생활환경은 안락해졌어도, 인간의 심성은 메마르고, 평안과 감사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아무리 감사를 잃어버렸고, 감사에 대해 무감각한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는 감사의 생활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유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현재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약속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 잃어버렸던 감사와 즐거움을 되찾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요, 책임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연약과 죄악으로 말미암는 사랑의 징계는 오늘날에도 계속됩니다. 뿐만 아니라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이 스탠퍼드 가()의 일처럼 우리에게 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환난으로 인하여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르는 회개와 믿음으로 다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잘되고,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궁극적으로 성공하고, 궁극적으로 영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자신이 처한 곳에서 고난이 닥치고, 환난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박국 선지자처럼 그것이 신속히 지나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진노 중에도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회복의 은혜를 바라보며, 확실한 소망으로 즐거워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믿음은 절망 중에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믿음은 역경 중에 용기를 가져다줍니다. 믿음은 실패 중에 승리와 영광을 가져다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11:1).

신앙의 선진들은 믿음으로써 증거를 얻었고, 그 증거를 남겼습니다(11:2).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11:6).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순경 중에도 역경 중에도 믿음의 삶이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댓글